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색 작전 (문단 편집) === 작전 발동 === 작전은 6월 28일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지난해 6월처럼 별다른 저항도 못해본채로 독일군에 드넓은 스텝 초원에서 포위되었다. 제 4기갑군은 [[보로네시 전투|보로네즈 맞은편 돈 강에 도달한 후]] 크림에서 오는 증원군과 합세하였다. 소련군은 후퇴를 거듭하였고, 7월 23일에는 돈 강 하구의 로스토프를 내팽개친 채로 도주했다. NKVD부대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작년과는 달리 소련군은 방어를 포기한 채로 뒤로 물러났다. 하늘에서의 싸움도 쉽게 흘러갔다. 4항공군은 성공적인 근접항공지원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도왔고, 소련군 비행장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소련군 전투기는 떠보지도 못한채 지상에서 쓰러져갔다. 최대 100기의 항공기가 소련군 1개사단에 대한 공격에 합세했다. 26일 동안 소련군은 약 800기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독일 공군의 손실은 175기에 불과했다. 7월 6일 소련군의 5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냈으나, 뒤에서 밀려오는 독일군에 어쩔 수 없이 15일에 원래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소련군의 소소한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이렇게 작전이 잘 흘러감에도 지휘부에서는 작전의 진행을 두고 히틀러와 일선 지휘관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페도르 폰 보크|보크]]는 교통중심지인 보로네시에 지나치게 집착했는데 측면보호를 위해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기갑전력이 도시에 묶여버렸다는 것이다. 작전 계획이 계속 지체되자 히틀러가 개입하여 기갑전력은 도시를 냅두고 진격하라했지만 이미 병력을 빼기에는 늦었다는 판단에 보크는 계속 도시를 공략했다.[* 청색 작전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히틀러의 실책이 컸지만 여기서만큼은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 히틀러는 결국 남부 집단군 사령관인 보크를 해임하고 [[빌헬름 리스트]](Wilhelm List)로 교체했다. 청색 작전은 이제 2단계로 접어들었다. 보로네시에서 소중한 시간을 번 [[세묜 티모셴코|티모셴코]]는 전선이 자리잡을 수 있을 때까지 후퇴를 계속했다. 이 시간동안 독일군은 로쏘쉬 등에서 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후속지원이 보로네시에 있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버렸다.[* 티모셴코의 질서있는 후퇴 덕에 소련군은 포위를 피하고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계속 후퇴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해임당하게 된다.] 이 탓에 독일군은 무주공산이 된 평야를 내달릴 수 있었다. 얼마나 작전이 빨리 진행됐는지, 보급선이 전진하는 공격군을 따라잡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칼라치 전투|6군은 연료부족으로 멈춰서야 했으며, 전진을 위해서 많은 차량이 버려졌다.]] 보급을 위해서 공군의 Ju 26까지 동원되었으나, 연료의 부족은 여전히 문제였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진격 속도를 문제삼아 일선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일을 벌였다. 히틀러는 포위망에 갇힌 적은 적지만 소련군이 붕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문에 크림반도의 11군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LSSAH 사단 등을 북부집단군, 재편을 위해 후방으로 빼버렸다.[* 보급 문제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런 공세에 자신감을 얻어 군을 두개로 분할했다. 이것은 청색 작전의 향방을 결정적으로 바꿔버린 선택이 되었다. 본래 할더는 전력을 분할하지 않고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여 무력화시킨 뒤 코카서스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재밌게도 보로네시에서 보크의 생각이랑 비슷한데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이 두 도시에서 최악의 선택을 해버렸다.] 이 계획대로라면 결과적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력을 분산한 히틀러는 처음에는 6군 단독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코카서스의 자원지대가 더 중요하고 적은 이미 붕괴되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문제는 스탈린그라드가 살아있는 한 코카서스로 진격하는 아군의 측면을 도저히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군이 일반 야전군이 아닌 증강된 정예군임을 감안해도[* 기본적으로 동일제대라면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규모가 크다.] 이는 무리였고 뒤늦게 4기갑군을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돌렸으나 결과적으로 이 전력으로도 무리였다. 1기갑군 17군 11군이 A집단군에 배속되었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지휘 아래 캅카스 유전을 향해 진격했다.[* 집단군의 분할 자체는 7월 초에 이루어졌으며 리스트가 두 달간 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나 9월 10일, 진격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해임시키고 히틀러 본인이 직접 두 달간 지휘하다가 --총통 겸 육군최고사령관 겸 집단군사령관-- 11월 23일, 1기갑군 사령관인 클라이스트가 영전하여 집단군을 지휘하게 된다.] B집단군에는 4기갑군 2군 6군이 맡겨져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의 지휘 아래 스탈린그라드 점령 임무를 맡았다. 더불어 추축국 4개 군도 B집단군에 배속되었다.[* 다만, 남부집단군의 관할이 너무 넓어 지휘부 분할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 개로 분할하고도 너무 넓어서 추축국 군대를 지휘하는 루마니아 집단군을 추가로 편성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스타프카는 당황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새로운 공황상태가 퍼졌다. 더군다나 별다른 저항없이 로스토프를 잃자 소련 인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사기는 완전히 무너졌고, 군은 와해됐다. 정치위원과 장교의 명령은 더 이상 병사들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스탈린은 이후로 계속 회자될 [[order 227|명령 227호]]를 내린다. Ni Shagu Nazad! 즉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이 명령은 상급 지휘관의 명령없는 후퇴에 대한 처벌을 약속했으며, 이 명령에 따라 [[형벌 부대]]가 창설되었으며, "공황 조장자"와 "겁쟁이"들은 즉결 처형당하거나 형벌 대대에 복무해야 했다. 점차 이 명령은 전 전선에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며, 소련군은 조금씩 부대를 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명령 227호에 대해서는 갖가지 오해와 전설이 난무한다. 가장 흔한 것이, 후퇴하는 사병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정치위원....[[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사실과 꽤 다르다. 명령 227호는 기존의 소련군에게 없었던 규율 역할을 했다. 사실 명령 227호는 단순히 적전 도주나 무단 이탈을 금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서구 군대라고 해도 적전 도주나 무단 이탈은 즉결 처형도 가능한 사항이었다. 물론 명령 227호 위반에 따른 후속 조치가 다른 군대들에 비하면 꽤 가혹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조처는 [[러시아군]]의 전통에서 기인한 면도 크다. 러시아의 삶은 대체로 가혹하고, 거주민, 특히 병사들은 이런 가혹한 삶에 익숙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나폴레옹 시절로 거슬러가 보아도 찾을 수 있다. 가혹하게 다뤄지며 절대 복종하는 병사들은 서구 군대의 반면교사이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정당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것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런 가혹한 조처가 공산주의 체재와 명령 227호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또한 명령 227호 자체는 정치위원과 장교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일반 후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후퇴를 막기 위한 저지 부대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전선이 아닌 후방에 배치되어 허드렛일이나 경비 임무를 맡았다. 게다가 저지부대는 11월부터는 새로운 명령으로 폐지된다. 명령 227호의 수행은 NKVD가 맡았지만, 이들은 이전과 같은 헌병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